동방기행 모음
동방기행 제1권
리안 포어벡의 대륙 횡단기를 담은 일지입니다. 반듯하게 제본돼 있습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세상사를 알고자 하는 독자 여러분들. 모두 반갑습니다! 저는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그간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제가 겪은 기나긴 여정은 평범한 주점에서 라셰미 용병을 만나면서 시작됐습니다. 서글서글한 친구였는데, 술을 사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흔쾌히 승낙했고, 시간이 흘러 맥주 여섯 잔을 비울 즈음에도 대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라셰미 민족의 전설에서 시작해 문화와 민담으로 물꼬를 튼 이야기는, 어느덧 은빛 동맹에서 칼림샨은 물론 이거니와, 문셰이 제도에서 보랏빛 사막에 이르기까지 그간 자신이 다녀온 곳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죠. 가만히 듣고있자니 제가 여태 베레고스트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 드넓은 세상이 앞에 있는데, 변소 주위나 맴돌며 짧은 생을 허비하는 파리 같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렇게 궁상맞은 삶에 작별을 고했죠!
이튿날 저는 짐을 싸서 여정길에 올랐습니다. 라셰멘을 답사해 이 멋진 세계의 견문록을 기록할 일념으로 치온타 강을 따라 동쪽으로 출발했지요.
동방기행 제2권
리안 포어벡의 대륙 횡단기를 담은 약간 너덜너덜한 일지입니다.
[책장이 온통 먼지와 진흙투성이입니다만, 여행 중의 청결 유지에 관한 장황한 서술이 적혀있고 그중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물론 강가의 길에서 새지 말라고 경고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험을 찾아 떠난 제게 "죽음의 들판"보다 솔깃한 장소가 또 있을까요?
발더스게이트에 거주하며 이 드넓은 초원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사람은 많아도 실제로 찾아간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보니 지명 자체는 이토록 불길하지만 정말 생명이 넘치는 곳이더군요! 뭐... 말처럼 생명이 넘치는 곳은 아니었지만 정직하게 밭을 일구는 농부들이 있었고, 까마귀가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애석하게도 (현지인들은 "고분"이라고 칭하는) 인근의 커다란 언덕을 답사 할 시간은 없었습니다만, 전해 듣기로는 고대 유물이 지천으로 널렸다더군요. 유물 사냥을 하기에 제격인 곳입니다.
동방기행 제3권
리안 포어벡의 대륙 횡단기를 담은 일지입니다. 곳곳에 얼룩이 묻어 있습니다.
저는 거르를 점쟁이 유랑 민족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하는 법이더군요. 길가에 피운 모닥불 위로 스튜가 든 냄비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중, 이들은 스스로 "셀루네의 아이들"이라 소개하며 고대 라셰멘까지 올라가는 민족사를 들려주었습니다.
거르의 전설에는 두 소녀 위클라란(마녀!)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두 소녀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청개구리였습니다. 참다못한 마녀 어른들은 노래나 실컷 부르라며 두 소녀를 꾀꼬리로 만들어 황금 새장에 가둬 버렸습니다. 둘은 새장에서 탈출해 페이룬 멀리 날아갔지만, 끝내 지쳐서 어느 클레릭의 정원에 내려앉았습니다. 클레릭이 셀루네의 이름으로 축복을 내리자 두 소녀의 저주가 풀렸고, 둘은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셀루네의 아이들이 되었죠.
오늘날의 거르 민족은 두 소녀의 후손이며, "소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가모장도 있다고 합니다. 셀루네에게 총애를 받은 이래 위클라란의 주술을 쓰지는 않지만 그 핏줄을 이어받은 덕에 어렴풋이 앞날을 볼 수 있는 이들도 있고요.
흥미진진한 이야기(스튜도 썩 괜찮았고요)지만 과연 사실일까요? 라셰멘에 가면 직접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그곳에선 정작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니까요.
동방기행 제4권
리안 포어벡이 쓴 일지입니다. 반듯하게 제본된 표지에 보라색 드래곤이 선명하게 양각돼 있습니다.
코어미어는 실로 멋진 나라입니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숲이며 늪까지 즐비한 지리부터 남다르지만, 수도 수제일의 웅장한 성곽은 그야말로 압권 그 자체입니다.
성곽은 먼발치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지만 멀리서는 그 규모를 제대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거리가 좁혀들수록 점점 높아지다 하늘로 솟는 성벽을 접하고 나면, 비로 소수제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채가 통째로 드나들 만큼 거대한 성문을 지나면 찬란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예 부대인 퍼플 드래곤 기사단이 시내를 순찰하며, 우아하고 세련된 옷차림의 귀족들이 길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항구는 전설로만 알던 곳들의 물건을 싣고 운석의 바다를 가로지른 배들로 붐볐습니다. 북적이는 부두에는 온갖 과일에 향신료며 비단과 동물 가죽이 가득하더군요. 주머니 사정만 넉넉하다면 이보다 풍성한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더욱이 고양이를 해치는 행위를 법으로 금한다니, 이만한 문명의 땅이 또 있을까요?
동방기행 제5권
리안 포어벡이 쓴 일지입니다. 물에 흠뻑 젖었다 말린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셈비아만큼은 반드시 피할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셈비아는 철면피의 나라가 틀림없습니다. 네더릴의 속국이었던 과거를 애써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제가 골짜기땅에서 남긴 기록을 훔치고 아예 저를 해적선에 팔아넘길 만큼 낯짝이 두껍더군요.
다행히도 저를 사들인 해적단이 다른 해적단에 습격 당했고, 제가 서기라는 것을 알아본 그쪽에서는 저를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전 해적선이 라셰멘으로 이어지는 동쪽 관문인 테스크로 향한다는 사실에 들뜬 마음으로 항해를 기록하려 했지요. 하지만 정작 항해 내내 선적 화물 명세서를 위조하는 작업만 해야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입니다.
동방기행 제6권
리안 포어벡의 대륙 횡단기를 담은 일지입니다. 고급지에 인쇄돼 있습니다.
테스크는 오크와 고블린이 즐비한 것 치고 의외로 쾌적한 나라입니다. 아무도 차별 받지 않는(그만큼 법도 느슨한) 진정한 인종의 도가니라고나 할까요.
이곳까지 저와 함께한 일행은 안타깝게도 항구 관리소장에게 덜미를 잡혀 투옥됐지만, 저는 여정을 재개했습니다. 이른바 황금로라는 길에 올랐는데, 정말이지 그 이름값을 하더군요.
온 대륙의 부가 바로 이 황금로를 오갑니다. 네버윈터 산 모피와 나쉬켈산 철은 동쪽으로, 비단과 보석은 서쪽으로 가며, 이에 질세라 방방곡곡의 다양한 풍문도 꼬리를 잇습니다. 황금로는 라셰맨을 거치고 유랑민 땅의 불모지를 가로질러, 제국과 드래곤과 짐승의 땅이자 제게는 미지의 세계인 카라투어 대륙까지 이어집니다. 그토록 가고 싶던 라셰멘이 코앞인데 이제는... 김이 새는군요.
어젯밤에 야영을 하면서 매력적인 나그네를 만났는데, 제가 라셰멘 땅을 밟는 것이 꿈이라고 하자 피식하고 웃더군요. 그러면서 라셰멘은 테이에 비할 바가 못 된다며 절키어의 궁정으로 저를 초대했습니다. 그런 과분한 초청을 거절한다면 무례일 테니, 우선 테이를 향해 발길을 돌리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라셰멘은 물론 그 너머로!
동방기행 제7권
근사한 검은색 가죽으로 제본했지만, 일지의 글씨체는 아이가 쓴 것 처럼 삐뚤빼뚤합니다.
테이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테이 사람들은 다정하고 친절해요. 테이는 집처럼 아늑해요.
이제 라셰멘은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아요. 카라투어는 두말할 것도 없고요. 더는 이리저리 다닐 이유가 없어요.
여러분도 꼭 와 보세요.
테이로 오세요. 테이는 정말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리안 포어벡